교육/한국사

기효신서, 속오법 - 조선후기 군사훈련

리치라이프 연구소 2023. 3. 2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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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효신서  >

<『기효신서』>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절강현(浙江縣)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 왜구(倭寇)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한 병서(兵書)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이 이 책의 전법을 활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은 『기효신서』의 전법을 연구하여 조선 실정에 맞게 적용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중국 명(明)의 무장 

척계광(戚継光)이 저술한 병서이다..

간결하고도 명료한 저술로 전략, 무기 및 맨손 격투, 

병원 선발, 훈련, 무기, 진법, 군율, 행군, 막사, 병법 등의 

다양한 방면을 다루고 있다. 

 

왜구 토벌 등에도 종군했던 척계광의 

군인으로써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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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왜구들이 쓰는 검을 대적하기 위한 전술로써 

칼을 떨쳐낼 수 있는 낭선(狼筅)과, 여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적을 대적하는 전법은 왜구 진압에 크게 효과를 보았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류성룡의 건의로 《

기효신서》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교범으로 삼았으며,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정조 시대까지 

척법(戚法)이라고 불리며 군사 훈련의 주요 교범이 되었다.

<부산진순절도>    1592년(선조 25)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 장면을 그린 것이다. 조총과 함께 장창, 왜검 등 단병기로 무장한 왜군이 성으로 돌입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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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입배경 >

조선은 기본적으로 문반 중심의 지배 질서가 강조된 사회였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무(武)에 대한 인식이 매우 미약하였다. 

선조 출처 위키백과


선조는 이와 같은 숭문 정책의 결과 생긴 문폐(文弊)를 두고,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혀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여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尙州)에는

 궁수가 세 명뿐이었다. 

 

풍속이 이와 같아서야 어떻게 적병을 막겠는가.”라고 하였고,

 

아울러 당시의 사회상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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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생들은 평일에

무사 보기를 이단과 같이 하고,

대접도 노비와 같이 한다.” 고 지적하였다.

임진왜란 출처 위키백과

이런 무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편견 속에서 1592년(선조 25)

7월에 명나라 조승훈(祖承訓) 군대가 치른

제1차 평양성 전투는 왜군에게 대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절강병의 맹활약으로 제2차 평양성 전투는 대승을 거두었다. 

절강병의 승리 요건은 전법이었다. 

 

대개 절강병은 한 대(隊)에 방패수 두 명, 

낭선수 두 명, 창수 두 명, 당파수 두 명, 취사병 등 

총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투할 때 방패수를 맨 앞에 배치하고 

이어서 낭선수·창수·당파수를 두어 

방패수·낭선수가 앞에서 적을 유인하면 

창수가 공격하고, 당파수가 뒤를 엄호하다가

 필요시 공격에 가담하는 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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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군  출처:나무위키


 화기와 단병기의 긴밀한 협조

왜군을 제압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 결과 평양성에서는 검술과 포술이 크게 유행하였고,

짧은 기간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먼 거리에서 장병기인 조총을 연속 사격하여 

상대를 제압한 뒤에 근접전인 백병전에서

 검술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육전에서 왜군이 거 둔 연전연승은 전술과 

무기 체계에서 우위를 차지한 결과였다.

 

 이러한 왜군의 우수성도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절강병의 전법과 무기 체계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먼 거리에서는 화포로 왜군의 조총 부대를 압도하였고, 

백병전에서는 다양한 무기 체계로 왜검을 능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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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출처:나무위키


이를 보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장기적인 양병책을 국방의 우선 과제로 삼아 

명나라식의 살수(殺手)를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명나라 척계광(戚繼光)240)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내용을 검토하게 하고, 

한교(韓嶠, 1546∼1627)를 통하여 

의문점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598년(선조 31) 10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단병기 무예서인

 『무예제보(武藝諸譜)』가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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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실현 방안으로

삼수병(사수·살수·포수)을 주축으로 하는

서울시 종로구 훈련도감터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척계광의 삼수병제(三手兵制) 병법에 따른

훈련을 시작하였다.

 

삼수병 중에서도 특히 창검을 다루는

살수의 양성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기효신서』의 제도를 도입해 놓고도

살수에 응모하는 지원자가 거의 없었고,

또한 살수를 비웃는 여론 때문에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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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훈련을 시작한 지 3년 이상이

지났지만 성과는 미미하였다.

이에 따라 전세가 위급한 순간에

짧은 무기로 접전하는 데는

검술만한 것이 없음을 알고

포수와 사수에게도 검술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

그 훈련 편제 방식은 속오법(束伍法)이었다.

속오군구폐절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속오법은 『기효신서』의 절강 병법을
토대로 한 속오분군법(束伍分軍法)에 따라 
편성한 속오군의 편제 방법으로 

임진왜란 때 지방에서 동원된 장정들을 
그 지방에서 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편성하고, 이를 각각 3∼5단위씩 묶어서 
군대 편제에 편입시킨 동원 군사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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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백과 위키실록사전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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