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한국사

이앙법(移秧法) - 조선시대의 논농사

리치라이프 연구소 2023. 3. 2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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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앙법

못자리에서 일정기간 모를 키운 후 본답에 옮겨 재배하는 농법.

 

이앙법은 벼의 모종을

일정 시기까지 구분하여 재배하고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다른 논으로 옮겨 심어 재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앙법을 통해 벼의 초기 성장과

이후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토지를

나누어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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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농사 >

농사직설&nbsp; &nbsp; 출처:우리역사넷

세종 11년(1429) 세종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農事直說≫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논에서 씨앗을 뿌려 재배하는 방법은

水耕·乾耕·揷種(移秧)의 3가지가 있었다.

논갈이 출처: 우리역사넷

수경은 물을 댄 논에 볍씨를 뿌리는 방법이고,

 

건경은 물을 대지 못한

마른 논에 볍씨를 뿌리는 방법이며,

 

삽종은 논의 일부분인 모판에

볍씨를 뿌렸다가 볍씨가 자라서

일정한 크기의 모가 되었을 때

본 논에 줄을 맞추어 옮겨 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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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 >

직파법 (수경, 건경)

조선 전기에는 비옥하고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논에서

早稻를 수경으로 재배하였고,

보통의 논에서는 晩稻를 수경으로 재배하거나

혹은 건경으로 재배하였다.

물이 부족한 마른 논에서는 건경으로 재배하였다.

점토질의 토양이 많았던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일부의 지방에서는

이앙이 부분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즉 수경과 건경이 주로 행해졌고

이앙은 일부의 지역에서만 행해졌다.

 

<국가에서는 이앙법(모내기) 금지>

 국가에서는 이앙을 실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앙법을 실시하는 경우 모내기할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벼가 완전히 말라 죽어 수확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는데 반하여,

 

직파법을 실시하면 씨앗을 뿌리고 벼가 자라는 기간에

비를 한두 번이라도 맞기만 하면 뿌리가 땅에 착근이 되어

 

그 뒤에 비가 오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가뭄이 드는 경우에도 직파법을 실시하면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는데 반하여,

이앙법은 전혀 수확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위험성이 많은 이앙법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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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18세기에 그린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중의 모내기 장면

 

그러나 이앙을 실시하면

노동력이 감소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7세기 이후 이앙법은 빠르게 보급되었다.

 

광해군 - 출처: 금강일보

광해군 11년(1619)에 펴낸≪農家月令≫에 의하면

“벼를 재배하는 데는 보통 4차례의 제초작업을 실시하는데,

이앙법을 실시하면 2차례만 실시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앙법을 실시하면 노동력이 감소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앙법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되었고,

17세기말에는 삼남지방에서 대세를 이루었다.

모내기 출처:우리역사넷

移秧法은 노동력을 크게 덜어주기 때문에

지금 삼남지방 외에 다른 도에서도

모두 이를 본받아 이미 풍속이 되었다.

가뭄을 만나면 모든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으나

갑자기 이를 금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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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근원이 있어 물을 댈 수 있는 곳은 이전대로 이앙하고,

높고 건조한 곳은 절대 요행을 바랄 수 없다.

그러나 봄물로 付種하거나 乾播하면

반드시 모든 농사를 망치지는 않는다.

 

각 읍에 분부하여 面任에게 물이 나오는 곳인지 아니면

높고 건조한 곳인지를 구별하여 이앙하도록 하고,

이전의 관습을 따르게 해서는 안된다.

높고 건조한 곳은 이앙하여 농사를 망치더라도

給災하지 않는다는 뜻을 명백히 알려라

(≪增補文獻備考≫田賦考 7, 勸農節目, 숙종 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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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국가에서도 이앙을 적극적으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이앙을 실시하면 노동력이 감소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각 지방마다 수리시설이 증가하면서

이앙을 실시하는 여건이 개선되어 갔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면화·연초 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밭작물들이

집중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함으로써

논농사에서 노동력을 줄일 필요성이 컸기 때문에

이앙법의 보급도 급속히 이루어졌다.

 

 또한 이앙을 실시하면

노동력이 감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확량도 증가하였으므로

이앙법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갔다.

 

 나아가 이앙법을 실시하면

1년에 두 번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직파법을 실시하면 3월에 씨앗을 뿌려

8월에 수확하므로 1년에 1번밖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앙을 실시하면 모판에 벼모를 재배하다가

가을보리를 수확하고 난 후

5월에 본 논에 모를 옮겨 심을 수 있기 때문에

1년에 2번 경작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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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서유구(徐有榘)는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을 종합하면서

이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었다.

 

이앙을 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김매기(제초)의 노력을 더는 것이 첫째요,

 

두 땅의 힘으로 하나의 모를 서로 기르는 것이 둘째이며,

 

좋지 않은 것은 솎아 내고

싱싱하고 튼튼한 것을 고를 수 있는 것이 셋째이다.

 

어떤 사람은 큰 가뭄을 만나면

모든 노력이 헛되이 이를 위험이 있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벼를 심는 논은 반드시 하천이 있어

물을 끌어들일 수가 있으며

하천이 없다면 논이 아니다.

논이 아니라도 가뭄을 우려하는데

어찌 이앙만 그렇다고 하는가

(徐有榘,≪林園經濟志≫本利志 권 5, 種藝 上 稻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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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역사넷

 이앙을 실시하면 노동력이 감소하고,

모를 옮겨 심는 과정에서 부실한 모를 제거할 수 있고,

나아가 모를 심는 땅과 본 논에 옮겨 심는

땅의 지력을 모두 이용할 수 있으니 그 이익은 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앙을 실시하면 직파를 실시할 때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노동력이 감소하고, 수확량도 증가하였으며,

나아가 가을 보리를 심으면서

이모작을 행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장점들이 알려지면서 이앙법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17세기 중엽 이후에

급속히 전파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말 19세기초에 이르면

삼남지방의 논에서는 대부분 이앙이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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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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