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한국사

과농소초 (課農小抄)

리치라이프 연구소 2023. 3. 1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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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농소초 (課農小抄)

 

1799년 실학자 박지원이 우리나라의 농학과

중국의 농학을 비교 연구하여 편찬한 농업서.

 

박지원은 중년 이후 서울을 떠나 

황해도 금천군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면서 

농학을 연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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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그러던 중, 1780년(정조 4) 삼종형 진하사(進賀使) 

명원(明源)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중국 농업의 현황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출처:한성대학교

그 뒤 지방관직 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우리 나라 농업의 현실을 관찰했고, 

그 동안 연구한 농학과 중국의 농학을 

비교 연구하여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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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농서


먼저 우리 나라 농서의 대부분이 

거칠고 자세하지 않기 때문에

 농지의 경영에 불합리한 점이 많아 

농업의 효과를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농법의 개선을 통해 

농지 경영을 발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종법(耕種法: 농작물의 선택이나 

재배의 순서 등을 자연적 조건에 맞추는 농경법)을 개량해 

 

지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며, 

영농 과정에서 노동력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중경제초(中耕除草 : 땅을 깊숙히 갈아 잡초를 제거함.)를 개선, 

 

노동력을 줄이고서도 

소기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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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보고, 

전래의 정전제(井田制)의 이념을 이어받아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하였다. 

 

이는 정전제와 같이 토지를 균등 분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 소유에 있어서 한도를 정해 토지 점유를 막으면, 

토지는 상속·매매 등의 방법으로 자연히 균분된다는 이론이다.

이처럼 ≪과농소초≫의 농업 이론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 농업의 기반 위에 그 결함과 모순을 시정하려 한 것이다. 

나아가 토지의 재분배를 통해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모순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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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1798년(정조 22) 11월 정조는 

농업상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전국에 농정을 권하고 농서를 구하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이에 당시 면천(沔川: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군수였던 

박지원이 1799년 3월 이 책을 올렸다.

 

 

연암 박지원 출처: 그린매거진

 

 

저자가 평소에 가져온 농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집적되어

이 책을 저술케 하였고,

따라서 그 농학은 문헌 중심의 연구가 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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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국왕의 윤음이 있은 뒤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련해두었던 초고를 기반으로 

그의 생각을 정리하고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를

 첨가해 올린 것이다. 

 

저술 과정에서 사용된 주 인용 서적은 

신속(申洬)의 농가집성,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이다.

출처:헤드라인뉴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머리에 서문 대신 편제(編題) 1문과 

<진과농소초문 進課農小抄文> 1편이 실려 있다. 


책의 구성은 크게 제가총론(諸家總論), 수시(授時), 

점후(占候), 전제(田制), 농기(農器), 경간(耕墾), 

분양(糞壤), 수리(水利), 택종(擇種), 파곡(播穀), 

제곡(諸穀), 품명(品名), 서치부비황(鉏治附備蝗), 

수확(收穫), 양우(養牛),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으로 분류된다.

기존 농정의 주요 개혁안으로 한전법(限田法)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농서로는 최초로 수리법(水利法) 조항을 

설정한 것이 주요 특징이다. 

 

1700년대 후기까지 만들어진 기존 여러 농서들 중 

그 체계가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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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린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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