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한국사

조의제문 (弔義帝文)- 무오사화의 원인

리치라이프 연구소 2023. 3. 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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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제문 (弔義帝文) - 무오사화의 원인

조선전기 문신·학자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하여

1457년에 지은 문서. 제사문.

 

김종직 출처:위키백과

조의제문(弔義帝文)이란 제목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란 뜻이다. 

 

 

초한쟁패기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의제(회왕)의 귀신이 

꿈에서 나타났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의제는 항량의 초나라 부흥군에

 왕으로 옹립된 왕실의 직계 후손이었으나, 

항우에게 쫓겨나 살해당했다.

 

 당시에 아이였다는 점과 

일찍 쫓겨나 살해당했다는 점에서 단종과 겹친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회왕이 왜 꿈에 나타났을까?"라는 

마지막 문장의 뉘앙스도 그렇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칠장복이었다. 

세자를 거쳐 왕으로 즉위한 정통성 있는 임금, 

즉,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의미한다는 것.

 게다가 조의제문에 나오는 날짜인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살해된 시기를 뜻한다. 

 

 

단종은 1457년 10월 21일(음력)에 죽었는데, 

이 1457년이 바로 정축년이다.

조의제문 출처:오마이뉴스


정리하자면, 여기서 항우는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뜻하고, 

 

의제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한 단종을 의미한다.

 

 

김종직은 왜 썼나?

사실 김종직은 이전에도 잡학과 불교를 중시했던 

세조에게 간언했다가 삭탈된 적이 있을 만큼 

강직했고, 조의제문을 지을 당시 김종직의 나이는

 27살에 재기 넘치던 젊은 시절. 

그의 원칙주의적 성격으로 보면 

내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의제문을 작성한 것과 앞서 말한 삭탈관직을 제외하면 

크게 세조와 각을 세우는 일은 없던 것으로 보아 

어떤 실제적인 계획이 있었다기보다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으로 해석된다.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다

 

 조의제문을 연산군한테 처음 올린 사람은 유자광으로 보인다.

출처:국제신문

기록에 보면 조의제문을 본 이극돈이 이를 봉하고

일체 발설하지 않도록 했는데

막상 다음날이 되니 한치형, 이극돈, 노사신, 윤필상등이

떼로 (살아남기 위해) 연산군을 찾아가서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했다.

영화 간신에서의 김강우(연산군역)

이는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누군가한테서 엿들은 다음에

이극돈 등한테 '빨리 갖고 와' 하고 버럭질한 결과로 추정되는데,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한 중신들 중에

유자광만이 실록청 당상이 아니었기에

조의제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했다.

 

즉, 유자광이 먼저 연산군에게 올리고

연산군이 이극돈을 추궁한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극돈은 '사초는 원래 임금이 볼 수 없으니, 

그걸 발췌하면 원칙도 지켜지고 문제도 해결된다.'는 식으로 

절충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 작업으로

 이극돈은 무오사화란 

사건에 자기 이름을 제대로 남기고 말았다.

출처:알라딘


오히려 이 사건으로 벌어진 무오사화 때문에 

이극돈은 보고를 늦게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당연히 올라갈 거라 예상되었던 정승 직위까지도 놓쳤다. 

 

그 대신 동생 이극균이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연산군은 이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고 

기어이 갑자사화 때 트집을 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한 거나 다름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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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중종반정 이후에는

또 이러한 전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당하고 까여서 이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고생 숱하게 했고, 후손 이이첨 또한

이 부분을 숱하게 인신공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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