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아이콘 공민왕
배경 : 원명 교체기, 원나라의 힘이 약해짐
1. 전국에 몽골풍 금지
공민왕은 대륙의 정세가 동요하자 이를 이용하여
원나라의 기반을 끊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한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숙청과 왕권강화>
1. 조일신의 난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일신(趙日新)이 정천기(鄭天起),
최화상(崔和尙), 장승량(張升亮)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다.
이로써 조일신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다.
이어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이제현을 우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2. 친원파 기철일당 제거
기철 - 기황후(공녀로 원에 끌려가 황제의 부인이 됨) 의 오빠
원나라의 기황후를 중심으로 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철 등 기씨일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한다.
그 동안 기씨일족들은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자오의 딸을
중심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하였다.
*권문세족 : 원나라 내정간섭시기의 지배층으로 친원파.
음서를 통한 신분세습. 대노장을 소유하고도 세금을 내지 않음.
힘없는 농민들을 노비처럼 부리며 부를 축척.
-> 당시 국가재정은 매우 궁핍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3. 신돈의 등장
<신돈의 등장>
1365년(공민왕 14),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을 등용하였다.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음.
고려 초기 지방으로 가서 향리가 되었던 이들.
그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봐서 중앙관리가 됨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정치적·사회적·
문화적 변혁을 이끌었던 세력.
사상적으로 이들은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한 학자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무신집권기 이래로 노정된 고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분투한 개혁세력이었다.
신진사대부가 등장하였을 당시
고려에서는 원(元)의 힘이나 국왕의 총애에 기대어
국정을 장악한 권문(權門)과
대대로 명망 높은 귀족가문이었던 세족(世族)이
긴밀하게 얽혀 공고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위 ‘권문세족’으로 통칭되는 이들은 구습을 고집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해왔는데,
신진사대부는 기존의 신진세력들과는 달리
이들과 영합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리학을 이정표로 삼아 고려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이러한 의식적 활동 속에서 새로운 왕조 ‘조선’을 탄생시켰다.
4. 정방 폐지
정방은 1225년(고종 12) 6월,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이다.
정당·정사당·죽당이라고도 한다.
최충헌 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마음대로 해 오던 것을
최우가 공식 인사기구로 정착시킨 것이 정방이다.
무신정권은 행정실무와 문서작성에 능한
관리가 필요했고
여기에 벼슬길 진출을 갈망하던 사인층의 요구가
서로 부응하면서 설치되었다.
정방은 관리의 임명과 해임, 승진과 좌천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하여 인사행정을 다루었다.
무신정권 이후에도 국가기관으로 변해
폐지와 재설립을 반복하다가 1388년(우왕 14)에 폐지되었다.
5. 쌍성총관부 무력탈환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백 년 가까이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할 지역의 수복을
명령하여 한반도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관직 명칭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것은
공민왕의 반원 개혁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원나라에 투항한
조휘와 탁청 이래 쌍성총관부에서
총관과 천호 직을 대대로 세습해온
한양 조씨와 탁씨 세력을 척결하는 데
조휘의 손자 조돈과 이자춘,
그리고 그의 아들 이성계가 결정적으로
내응해 쌍성총관부 격파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과
이자춘 부자(父子) 등이
고려 정계의 전면에 등장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인당에게 명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로 평가된다.
1362년(공민왕 11년)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6. 전민변정도감 설치
전민변정도감
권문세족들에게 빼앗긴 토지를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려고
임시로 설치한 관청
1366년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신돈은 민중들에게 '성인' 칭송을 받았다.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 권문세족이 조직적으로 저항했고,
신돈을 모함하여 사형에 처함.
1371년(공민왕 20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의지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고 만다.
그해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는 명을 내렸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7. 외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개혁 실패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방황했고 신하들에 의해 피살됨.
권문세족에세 대적할 만한 지지세력이 없었고,
흥건적과 왜구가 자꾸 쳐들어와서
내부개혁에 집중할 수가 없었음.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6년(공민왕 15년) 음력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에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다.
1368년(공민왕 17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70년(공민왕 19년) 1월과 11월,
이성계와 지용수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였고,
요동의 고려인을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8. 공민왕의 죽음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1372년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곁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자제위 중 한명인 홍륜(洪倫)이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내시 최만생이 은밀히 왕에게 보고하자,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 겠다."고 말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최만생은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날 밤에 홍륜은 권진(權瑨), 홍관(洪寬), 한안(韓安),
노선(盧瑄) 등과 더불어 모의하여 술에 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는
'도적이 침입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위사(衛士)들은 벌벌 떨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재상과 백집사들은
변을 듣고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날이 밝을 무렵에 명덕태후가 강녕대군(江寧大君)
우(禑)를 데리고 내전에 들어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이인임은 처음에 승려인 중 신조(神照)가
항상 대궐 안에 있었으며, 완력이 있고
남을 속이는 꾀가 많았으므로
그가 난을 일으킨 것이라 여겨 감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풍과 최만생의 옷 위에
피가 뿌려진 흔적이 있음을 보고서,
이에 최만생을 하옥시켜 국문(鞫問)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었다.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하여 변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그
들의 삼쪽 또한 멸족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에 시달렸으며,
이성계 일파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정리한줄 ------------------------
원나라의 풍습과 연호 및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 제도로 복구시켰으며,
정동행성과 쌍성총관부를 철폐하였다.
또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를 제거하고,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을 공략했다.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였고,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받아
국토가 황폐화되고 국력이 소모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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