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한국사

기해예송 (己亥禮訟) - 가장 치열했던 서인과 남인의 1차 예설 논쟁(禮訟論爭)

리치라이프 연구소 2024. 6. 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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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예송의 원래 의미는 '예절에 대한 쟁송, 논쟁'이며

이 문서에서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한 직후

효종의 의붓어머니인 장렬왕후가 행해야 했던 상례 격식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여러 차례 격렬하게 벌어졌던

학술적, 정치적, 사회적 논의. (기해예송, 갑인예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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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쌤의공부법 https://m.blog.naver.com/dossam2516/221058567294

 

 

역사적 배경


현종대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예송은 

효종이 종법적(宗法的) 지위에 대한 학자들 간의 인식 차이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즉 효종을 인조의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에 따라 

자의대비(慈懿大妃, 조대비)의 복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1645년(인조 23) 2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6월에 인조가 적장손인 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차자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시작되었다.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한 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가 

효종을 위해 입어야 할 상복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에 관해 모두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지만, 

종법에 의하면 차자도 대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되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그를 장자로 볼 여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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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적자이지만 장자는 아니었고, 

형 소현세자에 대해 이미 어머니가 큰아들에 대한 장례를 마쳤었다.

출처: 시선뉴스

 

왕위를 계승받은 국왕이었으므로,

종법상 모후인 장렬왕후가 효종을 차자로 보고

1년짜리 상복인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가

장자로 보고 3년짜리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된 것이다.

 

이에 관해 조정 신료들이 물밑에서 조심스럽게 논의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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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에 대한 논쟁!!!!.

 

1년짜리 상복인 기년복(朞年服)인가 아니   3년짜리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하는가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논의

서인들은 그를 차자로 인식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그를 장자로 간주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이 예송에는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예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서인 학자들이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한 반면, 

남인 학자들은 왕실 전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두 차례의 복제 예송이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정치적의의 (학문적배경)

 

출처: 무님의 역사이야기 https://bykk.tistory.com/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정치, 사회, 생활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왕조국가의 특성상 국왕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현실 정치와 크게 엮인 중대한 논란으로, 단순한 예법 논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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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한 복식 정도였지만,

배경적으로는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 체제 문제까지

걸려 있던 일대 격전이었다.

 

실제 송시열이 체이부정 이야기를 꺼낸 순간 정태화가 기겁하고 막아서며

경안군 이석견을 이유로 송시열을 막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예송은 시작부터 왕의 정통성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다.

다만 정통성 논쟁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역모로 처벌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나마 곁다리로 낀 상복으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논쟁 당사자들도 상복은 그저 꼼수라는 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어서, 정태화가 이석견(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을 이야기하거나,

윤선도가 상소에서 왕의 적통과 종통을 이야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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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논의 끝에 기년복이 채택되었는데,

남인 윤선도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윤선도를 탄핵하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기해 예송은 비록 효종의 장자 차자 지위를 구분하지 않는 

정태화의 ‘국제 기년복(國制朞年服)’이 채택되었지만, 

기년복은 기년복이었으므로 서인들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때 장자 차자를 구분하지 않은 것은 

이로부터 14년 후 제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의 정치는 1623년(인조 1)의 인조반정 이후 

효종 때까지 50여 년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하면서 

경제와 비판을 기조로 하는 이상적인 붕당정치가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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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 정리 출처:KBS

 

그러나 기해예송으로 인하여 당파 간의 감정이 격화되고 

군자-소인의 구별을 주장하는 흑백 논리가 팽배해지면서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와 치열한 정쟁으로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을 겪는 등 급격한 정국의 변환을 초래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나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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