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년(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시대적 배경
천주교 전래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에서 실학이라는 흐름과 맞물려
학인들의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부패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속으로 퍼져나갔다.
북경에서 조선 최초로 세례교인이 된 이승훈이 귀국한후
은밀히 신앙모임을 만들었으나
1785년에 형조에 적발되며
유생들의 거센반발이 있었다.(명례방 사건)
이 사건으로
김범우가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모임을 이끌던
이벽이 문중의 압박에 못이겨 자진하면서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곧 조직이 재건되어
교세가 성장했으나 제사금지라는
교리속에 배교자가 속출하였고,
이 교리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1787년 반회사건으로
천주학 서적이 색출된후 불태워지고
탄압의 강도가 점차 증가하였다.
천주교 탄압
1791년 폐제분주(廢祭焚主)로 불거진
진산사건으로 최초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전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으나
촌로의 무지한 소행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금번 사건의 당사자가 남인이라는 이유로
당쟁으로 비화되자 천주교에 대해 관대했던
정조도 단호하게 대처했다.
1795년에는 은밀하게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체포작전이 실패하자 도주와 잠행을 도운 신자들이
체포된후 순교하였다.(을묘박해)
한편, 남인들이 이 사건에 연류된 의혹이 있다는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이승훈은 유배되었고,
이가환과 정약용은 좌천되었다.
도주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숨어지내며
은밀하게 활동을 지속했다.
그의 전교활동으로 1794년에 4,000명이었던 교인수가
1800년에는 1만명을 육박하게 되었다.
유중철이 신유박해 때에 포졸들에게 잡혀가며
아내와 이별하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
출처: 카톨릭굿뉴스
전개
책롱 적발 사건 -> 정약용 구속 -> 지방 교회 탄압 -> 지방 교회 탄압
-> 주문모 순교 -> 황사영 백서 사건 -> 토사교문(討邪敎文)
책롱 적발 사건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정약종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으나
성상과 교리서적, 주문모 신부의 편지등은
후대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감추기로 하였다.
1월 19일에 이것들을
작은 책롱(冊籠)에 넣어 나뭇짐으로 위장한후
머슴을 시켜 옮겨놓게 했으나 운반도중에 밀도살한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오인 받아 포도청에 끌려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예상 밖의 소득을 얻은 조정은 탄압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곧 이승훈, 최창현 등 지도자급
인사들을 연이어 잡아들였다.
정약용 구속
책롱 적발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마음에 준비를 하고 지내던중
2월 8일에 형 정약전과 함께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국문장에서 단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뿐이었기에
이미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지난 1797년에 천주교도로 오해 받자
《자명소》를 써서 반박한적이 있었고
1799년에는 《책사방략》을 저술하여
배교를 분명히 했었다는 사실등을 밝혔다.
그러던중 잡혀온 여러 신자들의 국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사실에 대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한 물증들로 인해 정약용과
정약전은 구속된지 18일만에 감형되어 유배를 떠났다.
지방 교회 탄압
박해는 지방으로 확대되어 지방에서 잡힌 많은 천주교인들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각기 고향으로 다시 보내서
사형에 처했는데 이는 일반 대중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3월 13일(음) 여주에서 5명, 양근에서 10여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음)에는 최필제 등 6명이 처형되었다.
전주에서는 3월(음)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항검의 가족들을 비롯한 200여명이 옥에 갇히었는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유항검은 9월 17일 순교했고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가족들중 많은 이들도 순교했다.
주문모 순교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자
천주교 탄압이 다시 활기를 띄었다.
주문모는 1795년에 밀입국한 이래,
주로 서울에 있는 강완숙의 집에
거처하면서 전교에 힘써왔다.
6년간 이어진 그의 은밀한 활동은
교세확장에 큰 기여를 했는데,
지방에도 내려가 내포의 이존창과
전주 유항검의 집에서 머물면서
지방에서의 선교활동에도 힘썼다.
주문모는 박해가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거처를 여러번 옮겨 다녔으며 경희궁에 숨기도 했다.
한때는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국경지역까지 갔으나 자신 때문에
천주교인들이 고통을 받자 마음을 돌려
의금부에 자수를 결심하였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우려하여 추방령으로 감형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사형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주문모는 4월 19일(음)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
9월 29일(음), 황사영이 체포되자
신유박해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황사영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대신들은 환호했다
체포된 황사영의 옷 속에서 발견된 밀서를 읽고 모두 경악했다.
유교 지식인들인 조정 대신들이
보기에 유교의 윤리에
어긋나는 천주교를 믿는 황사영이 대박청래
곧 큰 배에 글을 잘 하는 선비와 군사를 타도록 하여
종교의 자유를 요구할 것을 청원하고,
나라를 외국에 팔아 넘기려했기 때문이다.
황사영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아
금지한 천주교가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종교임을 알고
신앙을 버린 정약용의 고발로 이미 2월11일에 체포령이 내려졌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정순왕후에 의해 특별체포령이 내려졌으나,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사영은 박해가 시작되자 2월에 서울을 빠져나와
충북 제천 봉양면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에 가서
토굴속에서 숨어지냈다.
숨어지내는 동안에
김한빈과 황심을 통하여 박해상황을 파악하여 자료를 정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밀서를 작성하였다.
훗날 《황사영 백서》라고 불리우는 이 밀서에는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비롯한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해 상황과
중국이나 서양의 군대의 무력을 통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달라는 요청 등이 담겨 있었다.
황사영은 11월 5일에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이 외세의 힘을 빌어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는 '대역모반의 매국종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황사영의 처삼촌이었던 정약용과 정약전은
밀서 작성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유배지에서 체포되어 취죄를 위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관련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노론 벽파내 의견이 갈리면서
극형은 면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다시 떠났다.
토사교문(討邪敎文)
1801년 12월 22일(음)에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이 반포하였다.
위정척사(衛正斥邪) 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신유박해의 상황 및 결과와
아울러 다시는 천주교를 믿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는
취지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에 가는 사신의 수를 200명 이내로 줄이고,
40일 이상 머물지 못하게 하는등 서학이나
서양문물을 접촉할 수 없도록 엄격한 쇄국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12월 22일 이전에 죄를 지은자중 사형을 선고 받은 자를
제외하고 모두 석방한다는 항목도 들어있다.
또한 사교를 믿는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언급을 했으나
이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예전의 지시를 뒤엎는 것이었다.
정순왕후는 토사교문을 발표한 뒤 더 이상
천주교도를 잡아들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가환, 권철신 등의 가족에게 형벌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미 검거된 천주교인들에 대한 처결도 해를 넘기기 전에
마무리 지을것을 명했다.
한편, 지난 1년간의 박해로 약 300명 정도가 죽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떠났다.
출처: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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