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 조선이 일본에서 보낸 국서에 회답 국서를 전하고 피로인을 쇄환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파견한 사절.
개설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일(朝日) 양국 간의 통교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강화 교섭은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대마도(對馬島)의 실리가 맞물리면서 빠르게 진척되었다.
1) 먼저 1604년(선조 37) 승려 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이 탐적사(探賊使)로 에도[江戶][현 도쿄]에 파견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만나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전쟁 중에 잡혀 간 피로인(被虜人)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2) 이후 조선 정부는 조선에서 요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군의 국서(國書)와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포박해 압송[犯陵賊縛送]한다는 강화 조건이 이행되자, 1607년(선조 40)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 일행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3) 이후 회답 겸 쇄환사는 1617년(광해군 9) 7월, 1624년(인조 2) 10월 두 차례 더 파견되었다.
담당 직무
회답 겸 쇄환사의 일차적 임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잡혀 간 피로인을 쇄환하는 일이었다.
회답 겸 쇄환사가 쇄환한 피로인의 수는 경섬의 『해사록(海槎錄)』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총 1,707명에서 1,885명 정도이다. 1617년 회답 겸 쇄환사 때는 321명, 1624년에는 146명이 각각 쇄환되었다.
한편 회답 겸 쇄환사의 또 다른 임무 중 하나는 일본 국내의 정세를 탐지하는 일이었다.
세 차례의 회답 겸 쇄환사 일행이 남긴 사행록인 『해사록』[경섬, 1607], 『부상록(扶桑錄)』[이경직(李景稷), 1617], 『동사록(東槎錄)』[강홍중(姜弘重), 1624] 등의 말미에 기재된 문견록(聞見錄)에는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사회·지리·풍속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정보는 대일 정책을 수립하는 데 기초적인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조선의 일본관 형성에도 일조하였다. 이 외에도 외교 업무로서 외교 서신에 관한 문제 및 진공 요청의 거절, 특송선의 도항 문제 등에 대한 처리를 지시받았으며, 이들에게는 무기 구입이나 염료로 사용되는 왜주홍(倭朱紅)의 구입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해행총재(海行摠載)』,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조선 통교 대기(朝鮮通交大紀)』 등에 기록이 실려 있다.
변천
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하여 일본에 파견된 회답 겸 쇄환사는
1617년, 1624년 두 차례 더 파견되었다.
1617년 회답 겸 쇄환사는 처음에 관백(關白) 히데타다[秀忠]가 천황가(天皇家)의 혼인을 축하하는 사절을 청하였으나 조선은 전례(前例)가 없음을 들어 거절하였다. 그 후 다시 1614년(광해군 6), 1615년(광해군 7) 7월과 11월에 거듭하여 사절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대마도가 성의를 다한 것으로 보고 중국에 알린 후 사절 파견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때 파견된 제2차 회답 겸 쇄환사가 가져간 조선 국왕의 국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의 근거지인 오사카[大坂]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절에는 정사는 오윤겸(吳允謙), 부사는 박재(朴梓), 종사관은 이경직이 임명되어 1617년 6월에 출발하였다.
세 번째 회답 겸 쇄환사와 1624년 10월에 파견되었다. 사절 파견 전인 1623년(인조 1) 조선에서는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7월 장군 이에미쓰[家光]가 장군직을 계승하자 이를 축하하는 사절의 파견이었다. 그리하여 1624년 8월 예조 참의 오백령(吳百齡)이 일본 집정(執政)에게 서계를 보내 회답 겸 쇄환사 파견을 알려 주었다. 새 막부 장군의 즉위에 따른 사절 파견은 1624년 제3차 회답 겸 쇄환사부터 시작되어 이후 통신사까지 이어지는 전례가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제4대 장군부터 이후 막부 장군이 새롭게 즉위할 때마다 일본에서는 고경사(告慶使)가 파견되었고,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전례에 따라 9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1차 회답 겸 쇄환사의 파견으로 임진왜란에 의해 단절되었던 양국의 국교가 정식으로 재개되었으며, 1609년 6월 교역을 위한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었다.
또한 사행 편에 귀국한 피로인이 44.4~48.6%를 차지할 정도로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쇄환된 피로인의 처우에 대한 준비가 미비한 탓에 피로인이 귀국한 후 고충은 상당하였으며, 이후 회답 겸 쇄환사 파견 때는 피로인의 적극적인 귀국 의지를 꺾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한편 회답 겸 쇄환사는 사절 규모, 구성, 물품 준비 등에서 이후 통신사 파견의 전례가 되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친 사절 파견은 일본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수집하면서 재침에 대한 우려를 극복하게 하였다.
<리치라이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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