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한국사

흥선대원군의 개혁

리치라이프 연구소 2022. 9. 2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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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되었다.
그가 정치를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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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로 행세하며 왕권을 노리다


이하응은 혈통으로 보면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그다지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다.
헌종 이후 끊어진 정조의 직계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으로 이어졌고
철종마저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왕위와 가까운 왕족들은 모두 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동 김씨들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흥선대원군


안동 김씨는 세도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들이 골라서 강화도에서 데려온 철종처럼
정치에 문외한인 왕을 원했다.
안동 김씨들은 조금이라도 왕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들을 끊임없이 견제했고,
견제는 역모라는 무서운 누명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혈통적으로는 왕의 자리와 멀지만 편입된 가계상 왕권과 제법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이 택한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은 건달처럼 행세하는 것이었다.

야심 없는 파락호를 자처하고 궁도령, 혹은 상갓집 개라는 치욕적인 별명까지 얻으며
세도가들의 눈을 피한 이하응은 아무도 모르게 조대비와 연줄을 대어
자신의 야망을 이룰 기반을 마련했다.

조대비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비로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가 되었지만
안동 김씨를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에 밀려 한
많은 궁중 생활을 했던 비운의 대비였다.

당시 조대비는 순원왕후 사망 이후 궁중의 최고어른이 되어
안동김씨에게 친정의 원한을 갚을 길을 찾고 있었다.
이하응은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와 친교를 맺어 조대비에게 접근하였고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하였다.

어린 아들을 앞세워 10년간 섭정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과 맺은 묵계대로
그의 둘째아들 명복을 철종의 후사로 지명했다.
12살 고종은 이렇게 그의 아버지 이하응의 노력으로 왕위에 올랐고
이하응은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이 되었다.


조선역사상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4명이 있지만,
왕의 아버지로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했다.

어린 나이의 고종을 왕으로 지명한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책 결정권을 흥선대원군에게 주어 그의 집정을 이루게 하였다.
오랫동안 세도가 양반들에게 무시당하며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흥선대원군은
시정의 건달 행세를 하며 깨달은 당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개혁 정책을 통해 해결해가고자 하였다.

2.흥선대원군의 개혁

 

운현궁


세도정치 타파


흥선대원군은 일단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동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그 와중에 국정 공백을 막기 위해서 김병학 등 일부 안동 김씨와는 손을 잡았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 관리 척결에 힘썼다.

서원철폐

그는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된 붕당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일부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에 있다고 보고 47개의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법률제도 확립

법전간행(대전회통, 육전조례)을 통해 19세기 변화된 사회에 적합한 법률 제도를 확립하였고
세도정치 동안 비대해진 신권을 제한하고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펼쳤다.

비변사폐지, 원납전 징수, 삼정의 문란시정

비변사를 폐지하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사치를 근절하기 위해 의복제도를 고치고 사창제도의 실시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양반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흥선대원군의 개혁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와 부담을 고스란히 양인에게 전가하고
상류층의 권리만 누렸던 양반층에게 그 부담이 일부 돌아감으로써
국고는 풍족해졌고 양인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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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표방한 나라였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조화는 세도정치라는 신권의 독주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비정상적으로 커진 신권을 제압하기 위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을 위주로 개혁을 주도해 나갔는데
이는 조선이 세계사의 커다란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일정 정도는 주효한 개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19세기 후반, 일찌감치 산업혁명 등을 통해 발달한 기술문명의 세례를 받고
제국주의화 되어가던 서양국가들은 거침없이 동양으로 진출해오고 있었고,
이러한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에 대한 집착은
일부분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왕권강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과 원납전으로 경제구조를 흐려 백성의 삶을 다시금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서구의 새로운 사상이 왕권중심의 유교사상을 교란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국정치를 펴 국제관계 악화시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 막아낸 두 번의 양요(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집권 초기 행한 개혁정치로 인해 강해진 국방력의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의 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할 기회를 놓쳐버린 사건이기도 하였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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