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한국사

조선전기 군대소집체계 - 진관체제

리치라이프 연구소 2022. 7. 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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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체제 - 조선전기 군대의 소집체계



진관 체제 설립 이전에는 마땅한 지방군 조직이 따로 없었고
모든 지방 수령에게 병마직(兵馬職)을 겸하게 했으나
실제적인 군사 조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잡색군(雜色軍)이라고 하여 군역 의무가 없는 각종 인정(人丁)을 동원해 편제했으나 이 역시 훈련에도 참가하지 않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따라서, 외침을 받아 일단 연해 지대의 진이 무너져버리면 이후 내륙 지방은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인지경이 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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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 북방의 이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요새나 성채에만 군이 배치되어 있던 데다
군의 지휘권이나 방위 영역 문제 등으로 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지역이
이민족에게 공격받는 현상이 벌어지자
세조는 군의 지휘 체계를 통일하고 지역 거점에다가 군사를 배치시킨 후
근처 지역을 거점의 군대가 방위를 하도록 하도록 하였다.
이후 다른 지방의 군 제도도 이와 비슷하게 정비되어
진관 체제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같이 정비된 진관 체제를 바탕으로 각 도에 병영과 수영(水營)을 두어
병마 절도사와 수군절도사로 하여금 육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전략상의 특수 지대를 설정하여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를
따로 상주시켰다.
즉, 내륙 지방에도 거진(巨鎭)을 세우고 그 주변의 여러 고을을 이에 분속시킨다는
방안이었고 이를 위해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는 다시 중·좌·우의 3익(翼)으로 편제하는 등
전국적인 군사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즉 전국의 군사체계를 주진-거진-제진으로 편성한 것이다.

출처 - 징비록


다시 말해
종래는 우리 나라의 군사 제도가 북방 지대의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와
남방 지대의 영진군(營鎭軍) 혹은 기선군(騎船軍), 번상군(番上軍)체제 등으로 번잡하게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렇게 군사 조직이 난잡한 것을
전국적으로 획일화하는 동시에 한반도 전체를 국방을 위한 군사 조직체로 묶어 조직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조는 13만 5천의 병력을 동원 할 수 있었으며
이 병력들로 경진북정, 정해서정 같은 원정을 벌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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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5세기 중기에 처음 구축된 진관 체제는
명종 시기인 16세기 중반까지는 큰 문제없이 돌아갔으나
이후 군역을 돈이나 쌀 등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대지주들이 늘어나면서 징병 대상인 보인들의 숫자들도 줄어들기 시작하자
점차 붕괴하기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16세기 이후 북방의 야인이나 남방의 왜인의 침입
기존과는 달리 대규모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삼포왜란 등 외적의 침공이 대규모로 일어나자
소규모 지역 방어 체제인 진관 체제는
이러한 대규모 외적 방위에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선조 대에 일어난 니탕개의 난은 진관 체제의 한계를 크게 보여주었기에
이후 진관 체제는 제승방략으로 대체되었다.

제승방략체제



그러나 제승방략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결국 기존의 진관 체제의 약점을 보완한 속오군 체제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속오군도 병자호란의 쌍령 전투에서 보듯이 한계는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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